내가 하루키를 만난 것은 고등학교 때였다. 난 평범한 학생이었고 흔히 구입하는 정석을 인터넷으로 주문하다 당시 신간으로 막 나왔던 <해변의 카프카>와 <냉정과 열정 사이>를 같이 구입했다. 한없이 쿨한 까마귀 소년으로 시작된 하루키 읽기는 학교 도서관에 있던 하루키의 도서들도 모두 읽게 되었다. 학교 도서관도 의외로 하루키 장서를 많이 가지고 있었다. <상실의 시대 (원제:노르웨이의 숲)>도 판권이 들쑥날쑥 했던 역사가 있었기에 다양한 번역본이 있는데 도서관은 그 다양한 스팩트럼을 모두 보유하고 있었다. 하루키는 기존 단편을 가지고 기억을 짜맞추듯 적어간 소설이 <노르웨이의 숲>이었기 때문에 모든 저술 사이에서 같으면서 다른 기분, 모호한 분위기를 어쩔 수 없이 풍길 수 밖에 없다. 그 결과로 자연스레 사건과 케릭터는 흐려지고 그 모호성만 감상으로 남게 된다. 그게 내 고등학교의 문학적 감수성(?)을 지배했다.

하루키는 수많은 단편과 연재글이 있는데 국내에도 번역서가 몇 권 있긴 있다. 전속으로 계약된 곳이 없어서인지 아니면 실로 일본에서도 판권이 제각각이라 그런지 몰라도 출판사마다 멋대로 엮어서 하루키 단편으로 출간하고 있다. 그 결과 번역도 다양하고 그 글마다 풍기는 느낌이 너무 달라 모티브만 가져와 새로 작성한 글과 같은 기분이 들 정도이다. 이 글을 쓰며 생각나는 단편은 <꼬깔과자>. 역자의 역량이 얼마나 중요한지 하루키의 소설을 통해 알게 되었고 하루키의 소설을 원어로 읽어보고싶다는 생각을 왜 하는지 알게 되었으며 또 그래야겠다고 결심도 했다. (하지만 여전히 일본어는 꽝)

하루키의 수필집이란 이름으로 기고했던 글을 모아둔 책이 시중에 있는데 그게 참 재미있는 책이다. 일상적이고 담백한 문체, 독특한 위트가 묻어나는 수필을 보며 나도 이런 글을 쓰며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의 영향으로 (물론 장르는 전혀 다르지만) 소설도 썼으니 그냥 독자라고 하기엔 조금 그 이상을 지향하고 그 시절을 보내지 않았나 생각한다. 갑자기 생각난 것이, 소설을 보내는데 아무래도 학생이다보니 그랬는지 선생님의 추천서였는지 뭔지가 필요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선생님께 그 원고를 드렸어야 했다. 그 탓에 내 나름 생각의 흐름을 표현하고자 했던 표현들을 아래아한글의 맞춤법 교정으로 다듬으셔서 외국인이 쓴 소설과 같은 맛(?)이 났다. 그리고 선생님이 추천서에 쓸 요량이었는지 좋아하는 작가가 누구냐, 심훈이냐, 박경리냐, 이렇게 물어보셨었는데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다 존경받아 마땅할 분들이지만 영향은 하루키인데 말하면 한소리 들을 것 같아서, 마침 담임 선생님도 국어 선생님이셨는데…

끊임없는 작품활동을 하고 있는데 저술 활동의 속도를 열심히 따라가지 않고 있는 열혈 독자는 반성해야 하려나. 요 근래 나오는 책들은 거의 읽어보지 못했다. <1Q84>는 군에서 읽긴 읽었는데 세 권을 붙여놓고 읽지 않아서 내용도 가물가물 하고, 언제 날 잡아서 다시 읽어야지 싶다.

하루키의 글은 언제, 어떤 책을 읽더라도 앞서 얘기한 모호성이 책 머릿말부터 뒷면 검은 바코드까지 지배적이라, 역시 하루키씨는 언제나 한결 같군요, 이런 느낌이다. 시대의 센세이션을 주도하던 작가인데 이제 점점 할아버지가 되어가고 있어 글에서도 정형성이 점점 나타나고 있긴 하지만, 그게 나이가 들어서 굳어가는 것이 아니라 점점 완성의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이라 생각된다. 내가 쓴 글인데도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조만간 노벨 문학상 타시길 기대해본다.

PS. 제목은 <곰을 풀어놓다> 패러디. 에세이 중에서도 <고양이를 풀어놓다>로 패러디한 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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